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흑인 대이동 (문단 편집) === 남부의 흑인 학대 === 그러나 이런 자유도 오래 가지 않았다. 연방군이 13년간의 주둔을 끝낸 [[1877년]]에 미국 연방 정부는 남부의 내전 세력이 없어지고 더 이상 반군이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여 연방군을 남부에서 전격 철수했다. 연방군에 눌려 살던 미국 남부 백인들은 이들이 떠나자마자 법안을 바꾸기 시작했다. 흔히 말하는 '[[짐 크로우 법]]'이 이때 남부 주들에서 나온 법안인데 흑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미국은 연방정부 선거와 주 선거를 가리지 않고 선거 절차를 주에서 결정한다. 주 정부가 선거 절차를 마음대로 결정하여 특정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인데 이는 2021년에도 [[투표 억압|벌어지고 있다]].[[https://m.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988491.html#cb|#]] 이를 막고 싶다면 연방의회에서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과 같은 별도의 법률을 제정해 간섭해야 한다.] 다른 권리들도 박탈하기 시작했으며 흑인에 대한 처우 개선을 전혀 하지 않아서[* 시민권은 연방 정부 관할이라 주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흑인들의 시민권은 유지되었다.] 흑인들은 노예제가 유지되었던 시절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뱀발로 '짐 크로 법'의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유색인종과 백인의 시설 분리다. 유색인종과 백인의 화장실까지 다르게 쓰기 시작한 것이 이때다. 사실 최소한 노예제가 유지될 때는 한 백인 부자[* 노예는 비싸서 당시 남부 백인 중 어느 정도의 형편 이상만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당시 남부엔 못 사는 백인들이 과반수였고 주 정부나 부자들의 입장에서 이들의 계급적 반발과 인종간 연대를 막기 위해 백인 우월주의로 저소득층 백인들을 선동한 것이었다. 또 남부 사람들 사이에서는 노예를 사들여서 성공하는 것이 일종의 유망한 성공 루트와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에 노예가 없는 사람들도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가 거느린 흑인 노예가 많았기 때문에 본보기로 한 명만 고문하고 나머지를 겁에 떨게 했지만[* 이는 흑인 노예들이 당시 남부 백인 부자들의 재산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인간 취급을 하지 않았으나 자기 재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주인도 노예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진 않았다. 물론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이제 백인 부자들이 더 이상 자신들의 재산이 아닌 흑인들을 보호해 주지도 않았고 흑인을 고문하거나 죽여도 주 정부에서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사람으로 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흑인들을 린치하고 살해하고 고문했다. [[https://www.nytimes.com/2020/06/16/us/reconstruction-violence-lynchings.html|'존중은 공포에서 나온다.'는 속언이 있듯이 오히려 노예제가 성행하던 시기엔 흑인을 폭행하거나 살해하려는 욕구가 있어도 그 흑인의 주인이 두려워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면 노예제가 철폐되고 주둔하던 연방군마저 떠나자 흑인들을 음해하려는 세력들이 거리낄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결국 주 정부들의 비호 아래[* 미국의 주들은 하나의 작은 국가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치가 헌법으로 강하게 보장되어 있어 주마다 법도 따로 있고 법원도 따로 있다. 연방법에 따라 특별히 규정하는 사항이 아니면 모두 주법으로 처리하고 주 법원의 사법 절차를 밟는다.] 이러한 린치 사건은 매일같이 벌어졌다. 당시의 린치는 백인들이 그냥 길 가고 있는 무고한 흑인들을 잡아 기분 전환 목적으로 고문하고 살해한 것이다. 길 가던 무고한 흑인들을 집단폭행하는 건 예사고 목을 베는 정도면 덜 잔인한 정도였으며 아예 숨이 끊길 때까지 불태워 죽이는 일도 많이 있었다. 물론 이래도 주범인 백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리고 사진 기술이 널리 퍼지면서 백인들이 린치한 후 자신들에게 죽임을 당한 흑인들의 사진까지 찍었는데 이걸 아예 기념사진 정도로 생각하고 교회 목사가 축하의 말을 하러 오기도 했다. 당시 린치당한 무고한 흑인들의 사진들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남부에 거주하던 흑인들은 1877년부터 40여년 간 대규모 이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박해가 심한데도 흑인들이 이동하지 않은 이유는 첫 번째로 당시 남부의 흑인들은 아직은 북부로 이주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서부, 동부, 북부(중서부) 등지에는 흑인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없었다. 한마디로 이주는 하고 싶었으나 일자리가 없으니 터전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둘째로는 북부나 서부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만한 돈이 없는 흑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흑인들이 이동할 자유조차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극우주의자 백인들이 린치로 흑인 이주를 막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